우리는 모두 해피 패밀리 - 고종석「해피 패밀리」

soosound 2013. 3. 19. 17:34

시대의 글쟁이들이 있다. 내가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으뜸으로 꼽는 이는 장르불문 단연 신형철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꼽는 글쟁이가 있는데, 바로 고종석이다. 한국일보 기자시절부터, 그의 글들은 기자들 사이에서 좋은 글쓰기의 표본처럼 여겨졌다고 한다. 예의 그의 글은 군더더기가 별로 없다. 하지만 그의 글들이 차갑지 않은 것은, 그의 표현에서 정(情)적인 구석이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그는 트위터에서 굉장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절필선언이 무색하다. 게다가 꽤나 지적으로 알려진 그가 몇 번의 사건으로 다른 트위터들에게 소위, '발리는' 현상을 목도하고 있자니, 그가 스스로를 위한 변인 듯한 「해피 패밀리」의 구절이 생각났다. 


"왜 그렇게 사람이랑 글이랑 다른 경우가 많지?"

"호모사피엔스가 명민하기 때문이지. 그 말을 교활하다고 바꿔도 되려나? 암튼 치장하는 기술이 자연계에서 가장 뛰어날 걸. 사람들이 쓰는 글이란 건 화장품이나 향수, 팔찌나 목걸이 같은 거지"

아내는 그걸 너무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자연스럽단 말이야?"

"그게 생물이 살아가는 방식인 걸, 뭐. 당신은 정말 아직도 어른이 못 됐구나." (27)


고종석의 '발림트윗사'의 일례로, '조지아' 트윗을 들 수 있다. 그는 '그루지아'를 '조지아'라고 쓴 기자를 조롱한 트윗을 썼다.(2013.3.6) '그루지아'는 러시아식의 국명으로 러시아를 싫어하는 사카르트벨의 공식요청에 따라 영어식으로 표현된 국명이기에, 잘못된 것은 그의 지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쓴 글처럼,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그래도 나는 그가 아주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의 오류를 지적한 트윗을 RT하는 최소한의 책임감 때문이다. 물론 정정보도를 해야만 한다는 기자의 강박이 작용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여담으로 언젠가 허지웅이 역사적 예수 연구서를 가지고 자신은 민중신학을 안 좋아하지만 선물받은 책을 읽겠다는 트윗을 날린 적이 있다. 그래서 그 책은 민중신학서적이 아니며, 민중신학을 비판할 때 부디, 서남동의 「민중신학의 탐구」나 안병무의 「민중신학 이야기」 정도는 읽고, 최소한의 지식을 바탕으로 비판했으면 좋겠다는 식의 트윗을 날린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허지웅이 바로 블록을 했다. 아는 만큼만 얘기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고, 거기다 비판이든 지적이든 그런 것들을 수용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해패 패밀리」는 주요등장인물들을 각 챕터의 제목으로 설정해놓았다. 그리고 그 챕터 제목의 주인공들은 그 챕터의 서술자가 된다.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동일한 사건과 인물들에 대해 서술하는데, 마치 추리소설마냥, 그 사건이 무엇인지 점층적으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사건의 당사자인 남성 한민형이고, 마지막 등장인물은 여성 당사자인 한민희다. 한민형은 학창시절 빛나는 외모와 영민한 머리로 잘 나가는 사내였지만, 술에 대한 욕망을 빼곤 별다른 욕망이 없는 것 같은 인물이다. 그렇다보니 출근도 띄엄띄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기가 맡은 일은 잘 마무리 짓고, 회사 동료들에게도 크게 미움을 받지 않는, 비현실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게다가 언어감각이 상당한 것으로 설정되는데, 글을 읽으며 고종석의 욕망이 그대로 투사된 인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민형 다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그의 아버지 한진규다. 사대부적인(권력지향적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대에 진학하지만 고시에 합격하지 못한, 중소출판사 사장인 그는, 적당히 현실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중간 규모의, 아니 작은 규모의 출판사를 운영하며 한세상 살아온 나는 신분의 힘이라는 걸, 계급의 힘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남에게 고개 숙이고 사는 인생이 얼마나 수모스러운지도 알고 있다. 내 나이가 되면 민형이도 그걸 깨달을까? 아니 그 아이는 이미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언젠가 민형이에게 그 얘길 노골적으로 꺼내자, 그 녀석은 오히려 "계속 공부를 하는 게 수모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알 듯도 싶었고 모를 듯도 싶었다." (55)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나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 더이상 공부하는 것은 학문을 위한 학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제껏 배운 것들을 토대로 현장에 뛰어들어 민중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운동을 하면서 좌절을 하고 인간에 대한 회의감으로 운동이 일면 싫어졌다. 이제 나는 한진규의 말을 이해할 듯도 싶고 이해하지 못할 듯도 싶다.


한민형의 챕터 마지막은, "세상에 금지된 것은 없습니다."라는 중얼거림이었고, 한진규의 챕터 마지막은 '그리운 내 딸 어여쁜 우리 장녀! 왜 그랬니? 왜 그랬니, 민희야!'라는 머릿속 절규다. 이 두 문장에서 민형과 진규의 현실 인식에 대한 차이가 여실히 드러난다. 세상에 금지된 것 없는 인생을 사는 민형과 사대부적 욕망을 어쩔 수 없이 내림받아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진규. 나는 문득 머릿속으로, 양귀자의 소설 제목인「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을 떠올리며, 정작 소설의 내용은 다양한 자살법이 나열된 김영하의「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들과 아버지의 다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어머니, 민경화다. 민경화는 자신의 챕터보다 다른 인물들의 챕터를 통해, 그 성격이 잘 묘사된다. 외도의 경험을 가진 교사로, 진규보다 더 욕망을 욕망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그를 통해 나는 푸코를 떠올렸다. 매우 짧은 그의 챕터는 온갖 욕망들이 난무하는데, 이는 또한 결핍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져 있다. 대학 시절 연애의 실패와 현재 민형에 대한 단절이 그것이다.


교사인 어머니 다음의 서술자는 교사인 며느리 서현주다. 


물론 나는 수학을 사랑한다. 인간의 감정, 사회의 계급구조, 온갖 끈적끈적한 물질성이 제거된 그 추상의 세계가 나는 좋다." (82)


학창시절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과목은 수학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수능 수학이 아닌 쓸데없이 본고사 시절 수학문제를 풀곤 했다. 한 문제를 푸는 다양한 방법들이 재밌었다. 빠르고 정확한 풀이가 좋은 풀이라고 강조됐지만, 나는 오히려 그 풀이에 동원가능한 방법들을 따져보는 것들이 더 흥미로웠다. 현주는 인간의 감정, 사회 계급, 끈적한 물질성이 제거된 추상 세계가 좋다고 한다. 한부모 아래에서,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가정환경을 가지고, 끈적거릴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가졌던 그에게 수학은 생의 도피처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순수학문적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수학에서 삶의 위안을 찾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반디앤루니스에서 오빠는 내게 황인숙 시집 「슬픔이 나를 깨운다」를 사주었다. 그 시집의 표제시를 어찌나 여러 번 읽었는지 지금도 외우고 있다.


슬픔이 나를 깨운다.

벌써!

매일 새벽 나를 깨우러 오는 슬픔은

그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 있게 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의 나직하고 쉰 목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슬픔은 가볍게 한숨지으며 노래를 그친다.

그리고,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모르겠어...... 나는 중얼거린다." (103-104)


「고종석의 여자들」에서 읽은 걸로 기억되는데, 황인숙은 그와 절친이다. 기억을 더듬으면, 그의 절친 황인숙, 강금실과 함께 기차여행을 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 글의 시작에서 말했듯, 그의 글이 정다운 이유는 이런 점이다. 살뜰히 책에서라도 친구를 새기는 것, 그의 이러한 재치가 좋다. 물론, <말들의 풍경>과 <어루만지다>를 읽으면서 느꼈던 그의 능글능글함이 이런 재치의 근간일 거란 생각도 든다. '재치가 좋은 인간은 대부분 능글스럽다.'는 나의 이 선험적 대명제를 제발 누군가 깨준다면 좋겠지만, 나는 야한 농담이 좋다. 어차피 이 글 상당수에 잡설이 끼워졌으니, 한 마디 더 첨언하자면, 시인으로 치면 고종석은 이성복과 맞닿아있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누구에게 기분 나쁜 소리일지는 모르겠지만, 둘 다 의뭉스럽다.


「슬픔이 나를 깨운다」 시 구절이 전부 옮겨져 있는 책의 내용 중, 절반만 가져왔다. 다 적을까, 아예 뺄까 고민하다, 이 시가 곧 한영미이기 때문에 타협하여 반만 적었다. 그는 슬픔이 생을 각(覺)하게 한 인물, 장영미도 한영미도 아니며 또 그렇기도 한「해패 패밀리」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이다. 대학 때, 이미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현재는 문화부 장관까지 꿈꾸는 촉망 받는 여성으로 그려지는 그는, 민경화가 입양한 딸이다. 그러나 친했던 친구의 딸을 입양한 것이라 믿을 수 없을만큼, 그는 식모처럼 일을 해야 했다. 그런 한영미를 가장 잘 보살펴준 이는 민형이다. 잘 생기고 친절한 민형을 그는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빠 같고 오빠 같고 애인 같은 그를.


영미와 한 방을 썼지만, 영미가 빤 속옷을 입었던 동갑내기 한민주가 그 다음으로 등장한다. 영화잡지 기자로 일을 하는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하지만 학창시절 오빠인 민형이 영미를 더 아낀다고 생각하여 결핍을 느끼게 된다. 이후 성인이 돼 영미에게 과거 철없이 군 행동들을 사과하고 잘 지내는 것 같지만, 성공한 영미에게 불편한 감정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런 민주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민형의 학교 후배인 이정석이다. 그는 매우 성실하고 영민한 인물로 민형의 제안에 의해 같은 출판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다음 챕터에 이어서 그가 등장한다.


아, 두 가지 오해가 있네요. 대학원 다니는 건 사실이지만,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내가 원한다고 해서 되지도 않겠지만, 사실 원하지도 않아요. 내가 바라는 건 좋은 저자가 한번 돼보는 거예요. 좋은 편집자를 겸하면서, 대학 바깥에도 괜찮은 연구자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독립 연구자가, 대학제도 바깥에 있으면서도 그 제도권 사람들보다 더 영향력 있는 연구자가 되고 싶어요. 망상이긴 하지만, 사르트르가 그랬잖아요. 앙드레 고르도 그랬고." (134)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묘. 묘비에는 공산당 기관지였던 뤼마니테(l'Humanité)와 담배 한 개비가 놓여있었다. 프랑스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Cimetière Montparnasse), 2012 ⓒ soo_sound

민주와 정석의 대화는 지적이고 흥미롭다. 그리고 정석의 입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사르트르, 고르, 라캉, 소쉬르, 레비스트로스는 모두 내가 좋아하는 학자들이 아닌가. 특히 레비스트로스로 대화가 이어졌을 땐, <슬픈 열대>를 자기 전에, 조금씩 읽어주던 옛 연인이 떠올랐다. 언젠가 고종석에게 누군가 트윗으로 한국의 등단제도에 대해 물었다. 그는 '변태적'이라고 답했는데, 나 역시 매우 공감한다. 한국에서 등단하는 방법은 전형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매우 '사대부적'(책에서 그는 이를 권력지향적인 속성과 같다고 표현한다.)이다. 신춘문예입상이 곧 등단이니, 이게 곧 변태적이지 않고 무엇이겠는가. 부분부분에서 드러나는 이런 야인적 면모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이정석에 뒤를 이어 등장하는 인물은 서현주의 어머니, 강희숙이다. 그는 원서로 책을 읽을 정도로 지적이지만 강박신경증으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그는 현주에게 영향을 줄까병의 심각성을 최대한 숨기며 살아왔다. 하지만 병세가 깊어지자 현주와 사위인 민형에게 '병의 역사'에 대해 얘기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민형은 장모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린다. 친모에게 매정한 민형이 장모 희숙에게 다정한 것은 영미에게 그러했듯, 그의 심성에 따른 것일게다. 혹은 사회에서 용납 되기 힘든 이들과의 연대의식(투사)의 발로일 수도 있고.


현주와 민형에게 자신의 병을 고백한 이후, 약을 투여받으며 비교적 안정적 삶을 유지하게 된 희숙은 손녀인 한지현을 돌본다. 한지현과 강희숙의 대화는 마치 그리스 철학자들의 대화를 연상시킨다.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이 책의 결론적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 우리 식구가 몇 사람이야?"

"왜 갑자기 그런 건 물어봐?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응, 몰라서."

"그래? 생각해보자. 네 사람일 수도 있고, 여덟 사람일 수도 있고, 더 많을 수도 있지."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응, 식구들 중에는 가까운 식구도 있고, 좀 먼 식구도 있고, 아주 먼 식구도 있으니까 그런 거야."

"아주 먼 식구? 그게 뭐야?"

"응, 따지고 보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 우리 식구지."

[...]

"그런데 사람들만이 아니란다. 원숭이, 고양이, 개, 사자, 참새, 꽁치, 소나무, 대나무, 장미꽃 이런 것들도 따지고 보면 다 식구란다."

[...]

나는 할머니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 그렇지만 꽁치가 내 식구라구? 어떡하지 나 꽁치구이 좋아하는데… (181-183 부분)


이 대화를 끝으로, 민형의 누나이자, 정석의 환상의 여인인 한민희의 일기와 편지가 나온다. 그는 이 모든 등장인물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엮어주는, 지현이의 꽁치 같은 인물이다.  


「해피 패밀리」는 꽤 흥미로운 전개를 펼치기 때문에, 읽기 시작하면 아마도 한숨에 다 읽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이 마음에 드는 것은 책무게가 가볍다는 것이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띠지가 있다는 것인데, 띠지제작업자들도 먹고 살아야하니, 어쩔 수 없겠지란 생각을 한다. 그들도 따지고 보면 다 한 가족이니까.


봄날, 따스한 햇살 아래서 시간을 잊고 읽기 좋은 책이다.



해피 패밀리

고종석 지음/문학동네